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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가장 진보적이고 엘리트였던 여성의 끔찍한 최후 (영상)


‘5개 국어 능통, 동양인 최초 스웨덴 스톡홀름대학 정치경제학 전공, 조선 최초의 여성 경제학사’

일제시대 최고의 엘리트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는 한 여성의 비참한 최후를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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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05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조선 여성 최영숙은 이화학당을 졸업한 뒤 중국 회문 여학교에서 수학, 1926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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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숙은 오직 고국을 위해 모든 걸 바치겠다는 마음만을 갖고 1926년 7월 2 3일 하얼빈에서 유럽-아시아 연결 열차를 타고 스웨덴으로 떠났다.

ebs 역사채널e

처음 스웨덴 땅을 밟고 그녀는 사무치는 외로움에 힘겨워 몇 날 며칠을 울며 보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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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목적을 가지고 있는 이상 울기만 해서 아무 소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몇 개월 간 스웨덴어를 배웠다.

낮에는 공부를 하고 밤에는 자수를 놓아 생계를 이어가던 중 최영숙은 1927년 스톡홀름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동양인으로서, 조선인으로서 최초의 여성 유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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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유학당시 최영숙은 조선어, 일본어, 중국어, 한문에 능통하며 스웨덴어까지 할 줄 알고 학구열이 왕성했기 때문에 스웨덴 아돌프 황태자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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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황태자 도서실에서 연구보조원으로 일하며 폭넓은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Gustaf VI Adolf / 위키피디아

학업을 마친 최영숙은 귀국길에 오르기 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인도, 베트남 등 20여 개국을 여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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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에서 인도로 마지막 여정을 가는 동안 그녀는 인도인 아버지와 조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인도 청년 ‘미스터 로’와 만나게 되었다.

미스터 로와 최영숙 / 신동아

스웨덴 유학 시절 숱한 남성들의 구애에도 철옹성 같던 그녀였지만 미스터 로는 달랐다. 그는 그녀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그녀를 배려해주었고 지속적으로 관심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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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최영숙의 마음도 미스터 로에게 향하게 되었고 둘은 결혼식을 올린다. 인도에서 그와 지내는 동안 최영숙은 마하트마 간디, 나이두 같은 저명한 독립운동가들을 만났다.

조선일보

하지만 결혼 생활이 3개월도 채 못 되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사명을 떠올리며 남편에게 귀국의 의사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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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그녀의 뜻을 존중해 ‘1년에 한 번씩은 오라’며 그녀를 보내주었다. 당시 그녀는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스톡홀름 대학 재학 시절 / 조선일보

그렇게 귀국길에 오른 최영숙은1931년 말, 동양인 최초로 스웨덴 스톡홀름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사를 전공한, 그리고 조선 최초의 여성 경제학사로서 금의환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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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언론들은 보기 드문 여성 엘리트 최영숙의 귀국 소식을 대서특필하며 그녀의 귀국을 반겼다.

그녀 역시 조선의 노동자와 여성의 권리 신장을 위해 뜻을 펼치고자 했다.

ebs 역사채널 e

하지만 귀국하고 보니 그녀의 집안은 몰락해 있었고 당장의 생계가 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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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그녀는 자신의 경제학적 지식과 유학 경험 및 5개 국어(영어, 독일어, 스웨덴어, 일본어, 중국어) 구사 능력으로 대학 교수, 교사, 기자 등의 일자리를 알아봤다.

ebs 역사채널e

하지만 당시 경제 대공황의 여파에 대졸자 실업률은 50%에 육박했고 이에 더해 조선인과 여성에 대한 차별은 심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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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어떤 일자리에서도 최영숙을 받아주지 않았고 그녀는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워졌다.

ebs 역사채널 e

아무도 그녀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아 그녀가 돈을 마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서대문 밖 거리의 작은 구멍가게에서 콩나물, 미나리, 배추 등을 파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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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이 날로 어려워져 결혼반지마저 팔아야 했지만 최영숙은 절친한 친구의 도움도 거절하며 취직자리를 알아보고 장사를 하며 사회를 위한 일에 발벗고 나섰다.

ebs 역사채널e

어려움에 처한 여자소비조합을 돕기 위해 자금을 변통해 인수하고 밥까지 굶어가며 공민학교를 위한 공민독본 편찬에 나서는 등 자신의 몸을 챙길 겨를이 없는 나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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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한 몸으로 사회운동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니 그녀의 몸은 성할 리 없었다.

결국 그녀의 건강은 급속하게 나빠졌고 귀국한 지 5개월만인 1932년 4월23일,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신동아

스웨덴 경제학사 최영숙의 비참한 최후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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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숙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스웨덴 유학까지 하고 온 인텔리 여성이 어떻게 인도에서 ‘혼혈 사생아’를 임신하고 돌아왔는가”에만 쏠려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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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숙이 세상을 떠나고 며칠 뒤 그녀의 남편 미스터 로에게서 “여비를 보내니 인도로 돌아오라”는 편지가 왔다.

최영숙의 사망 소식을 보도한 조선일보

한편, 조선 최고의 인텔리 최영숙에게는 행복하게 살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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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녀가 스웨덴에 남기로 결정했다면, 그녀는 국왕의 총애를 받으며 마음껏 한평생을 살았을 것이다.

또 만일 그녀가 인도에 남았다면, 남편과 뱃속의 아이와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행복한 인생을 살다 갔을 것이다.

그러나 최영숙은 오직 조국을 위해 사명을 갖고 돌아왔으며 그 결과 꽃다운 나이 27세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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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출처: 네이버 TV ‘EBS 역사채널 e’ (본 기사의 내용과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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