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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 협박’ 굴하지 않고 일본 ‘제국주의’ 만행 밝힌 양심적인 일본인 6명

연합뉴스


일본과 우리 나라 사이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역사적 문제의 앙금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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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는 우리 나라의 식민지 문제, 특히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지만 일본의 일부 시민들은 해당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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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지난 11월 25일 일본 도쿄 시부야 역 앞에 300여 명의 일본 시민들이 모여 촛불을 상징하는 형광봉을 들었다. 그들은 퇴근길에 오른 일본 시민들에게 “우리는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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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양심있는 일본 시민들은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자국민 및 정부에게 진실을 알리고, 부끄러운 역사와 당당히 마주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이번 집회를 주도한 일본의 시민단체 ‘일본군 위안부문제해결전국행동’ 의 공동 대표 시바 요코는 “일본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인권 후진국을 향해 가고 있다”며 아베 정권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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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양심 있는 일본인’으로 활동하며 갖은 살해 협박과 손가락질에도 일본의 군국주의적 만행을 낱낱이 파헤치는 일본인들이 있다.

은폐된 진실을 밝히고 나아가기 위해 치욕의 역사를 정면으로 마주한 ‘양심적인’ 일본인 6명을 모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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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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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8월 14일, 故김학순 할머니는 자신이 일본군 성노예였음을 밝히며 전 세계 최초로 일본군의 만행을 폭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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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기자회견이 열리기 3일 전, 일본의 유력 일간지 A신문에 김 할머니의 증언을 고스란히 실은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前 조선인 종군 위안부, 전후 반세기 만에 무거운 입을 열다’는 제목의 기사는 김 할머니가 위안부로 고초를 겪었던 증언을 생생히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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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일간지 중 최초의 위안부 보도로 밝혀진 해당 기사는 당시 A신문 서울특파원으로 활동했던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가 작성했다.

1990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윤정옥 대표의 기고문을 읽고 위안부의 존재를 알게 된 그는 일본에서 이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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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언론 및 우익 단체는 우에무라 기자에게 “가족까지 모두 살해하겠다”며 각종 협박을 일삼았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관련 저서 ‘나는 날조 기자가 아니다’ 등을 출간하며 일본군 성 노예에 관한 진실을 알리기 위해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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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호사카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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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카 유지 교수는 현재 세종대 교양학부 교수이자 세종대 독도종합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독도 알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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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현재 귀화해 한국 국적을 취득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일본인으로서 독도는 ‘한국땅’이라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호사카 교수는 도쿄대 금속공학과 출신으로, ‘일본은 왜 한국과 아시아를 침략했는가’라는 의문을 풀고 싶어 1998년에 고려대학교에 입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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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석,박사 과정을 모두 밟고 난 후 세종대 교수로 임용돼 수업을 하던 중 그는 한 학생으로부터 “독도는 누구 땅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 때부터 호사카 교수는 독도 영유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이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답을 얻게 된 뒤로는 해당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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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알게 된 일본 극우세력의 협박도 이어졌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활동을 이어갔고, 2003년 한국으로 귀화했다.

호사카 교수는 한국인이 된 지금도 일본 이름을 사용한다. 그는 이에 대해 “일본인 이름으로 ‘독도는 한국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다고 판단했다”는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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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야시 에이다이

EBS ‘지식채널e’

하야시 에이다이는 일본의 작가로, 일제강점기 시절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삶을 그 누구보다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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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50여 년 동안 끊임없이 역사를 기록하는 데 자신의 삶을 할애했다. 조선인 광부, 노동자, 특공대, 군 위안부, 시베리아 억류자, 사할린 학살 피해자 등 일본의 참혹한 군국주의 만행에 희생된 자들을 조명하고 기록했다.

또한 이에 그치지 않고 직접 피해자들을 찾아가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고, 취재 과정에서 중요한 공문서를 발생할 경우 이를 유족들에게 알리는 역할도 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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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정확하게 사건을 기록하기 위해 가해자들에게 당시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야시 에이다이는 무려 57권의 단행본을 집필했다.

책을 출간할 때마다 그는 우익 세력으로부터 협박 전화를 받아야 했지만 그는 펜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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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그가 이러한 협박에 굴하지 않고 집필을 한 데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 1945년 8월 해방을 맞이한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던 조선인 광부들이 그를 찾아와 돈 ‘10엔’과 편지 한 장을 건넨 것이다.

편지에는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그 때 조선인 광부들에게 받은 10엔을 자신의 유산이라 밝혔던 하야시 에이다이 작가. 그는 안타깝게도 올해 9월 1일 암투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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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우쓰미 아이코

뉴스타파

우쓰미 아이코는 오사카대학 아시아태평양연구소에서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관련 연구를 진행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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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적인 일본 지식인’이라는 수식어를 갖고 있는 우쓰미 교수는 조선인 BC급 전범 피해자 모임 ‘동진회’를 응원하는 모임에도 참여하고 있다.

‘BC급 전범’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일본의 전쟁 책임을 대신 짊어지고 전쟁 범죄인으로 낙인찍혀야 했던 조선인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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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에게 강제로 징용돼 최말단에서 희생됐지만, 외국인 특히 조선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본에서 어떤 배상도 받지 못했다.

우쓰미 교수는 ‘전시포로 연구회’, ‘강제징용 네트워크’ 대표 등을 역임해 이런 BC급 전범들이 일본으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와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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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환으로 그는 연구를 통해 ‘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 ‘전후보상으로 생각하는 일본과 아시아’, ‘적도에 묻히다’등의 저서를 출간한 바 있다.

또한 아베 신조가 발표한 ‘70년 담화’에 대해 일본 지식인들과 함께 “사죄와 반성을 담아 다시 표명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해 화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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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라이 신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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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이바라키대학에서 명예교수로 활동 중인 아라이 신이치는 한국 문화재 반환을 위해 힘써온 인물이다. 또한 일본군 위안부 해결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서 ‘일본의 양심’이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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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도쿄대에서 문학부 서양사학과를 졸업한 이후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연구를 진행하며 일본의 책임을 전 세계 알리는 데 힘써 왔다.

특히 1993년에는 ‘일본전쟁책임자료센터’를 설립했고 한국·조선문화재반환연락회의 대표를 맡았다. 이를 기점으로 그는 본격적으로 한국 문화재 반환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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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아라이 교수는 일본군이 위안부에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증거가 담긴 업무일지 60점을 공개, 대내외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또한 지난해에는 한일 위안부 합의와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는 직접 피해자와 면담해 그들의 목소리에 겸허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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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진정한 지식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아라이 교수는 지난 10월 11일 담낭암 투병 생활 끝에 향년 91세로 별세했다.

 

 

6. 요시무라 아키라

요시무라 아키라 기념 문학관

요시무라 아키라는 ‘간도 대지진 조선인 대학살’의 전말을 숨김없이 드러낸 역사 소설가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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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9월 1일, 일본 간도 지방에 진도 7.8 규모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그 이후, 뒤숭숭한 일본인들 민심 사이에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런 유언비어는 마치 사실인것처럼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가, 일본인 1천여 명은 자경단을 꾸려 조선인들을 보는 즉시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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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우익 세력은 ‘간도 대학살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1973년 요시무라 아키라는 소설 ‘간도 대지진’을 출간, 자신의 소설을 통해 조선인 대학살의 참혹했던 전말을 폭로했다.

그는 이 소설을 완성시키기 위해 끊임없는 취재와 고증으로 사실에 기반한 역사 소설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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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실이 아니면 절대 한 줄도 쓰지 않았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요시무라 아키라는 췌장암으로 2006년 7월 30일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