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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후원한 ‘착한 기업’ 5곳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군’들의 든든한 자금줄이 되어준 착한 기업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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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pidea

친일파 후손들은 부당하게 모은 재산을 물려받아 떵떵거리고 사는 반면, 나라를 위해 모든 재산을 지원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어려운 생활 형편 속에서 살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시절 그 어떤 조건도 달지 않고 독립운동가를 후원했음에도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기업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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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독립자금을 지원한 일이 발각된다면 사업기반은 물론 목숨까지 내놓아야 했음에도 이들은 결코 독립운동 후원을 멈추지 않았다.

3.1절을 맞아 독립운동을 후원한 ‘착한 기업 5곳’을 소개한다.

나라의 안위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해당 기업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가슴 깊이 새겨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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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LG

(좌) 연합뉴스, (우) LG 사이버역사관

LG 그룹의 구인회 창업회장은 중경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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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7월 구인회 회장은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선생이 독립운동 자금을 부탁하자 1만원을 쾌척했다.

당시 일제로부터 지명 수배를 받고 있던 안희제 선생에게 독립자금을 지원한다는 것은 집안이 풍비박산될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하기에 큰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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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구인회 회장은 “당할 때 당하더라도, 나라를 되찾고 겨레를 살리자는 구국의 청에 힘을 보태야 겠다”는 말과 함께 1만원의 독립 자금을 희사했다.

 

2. 교보생명

(좌) 교보생명 브랜드커뮤니케이션팀 트위터, (우) 교보생명 공식 블로그

교보생명 창업자인 신용호를 비롯해 그의 아버지와 형들도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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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온 가족이 독립운동을 하는 전형적인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으로 늘 일제에 쫓겨야만 했다.

신용호는 19살에 장사를 할 마음으로 집을 나와 중국으로 갔지만, 그곳에서 민족시인 이육사를 만나 그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보탰다.

그리고 결국 가족들과 함께 다시 독립운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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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한양행

유한양행

유한양행 창립자인 유일한 박사의 신념은 “건강한 국민만이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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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박사는 9살에 미국으로 가 대학을 마쳤지만,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926년 귀국해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그는 광복 촉성을 위한 ‘해외 한족 대회’의 집행위원과 미국 전략 정보처 OSS의 한국담당 고문을 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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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942년 미국으로 건너가 항일무장독립군 창설을 주도하는 등 직접 독립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 정신을 이어 유한재단은 생활고를 겪는 독립유공자 후손 300여 가구에 월 12만원씩 연간 4억원 규모를 지원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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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동화약품

동화약품

‘까스 활명수’의 개발자인 동화약품 민병호 선생의 아들 민강 사장은 1920년대에 까스활명수를 팔아 번 돈을 독립운동 지원에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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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대동단’이라는 항일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해 활동하며 동화약품을 대동단의 연락책으로 제공했다.

민강 사장이 있었던 동화약품의 본사에서는 당시 상하이 임시정부와 독립단체들의 국내외 연락을 담당하는 ‘서울 연통부’를 운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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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독립운동에 연루돼 두 차례 옥고를 치른 뒤 숨을 거뒀다.

하지만 그는 죽는 순간까지 나라를 위해 희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5. GS

(좌) GS그룹, (우) GS 공식홈페이지

GS 그룹의 허창수 회장 아버지 허준은 만주 독립운동의 자금줄 역할을 한 백산상회를 공동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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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할아버지 허만정 선생도 일제 몰래 꾸준하게 독립운동을 지원해왔다고 전해진다.

‘백산상회’는 독립운동 전체 자금의 60% 가량을 지원한 곳이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영리 기관으로 가장했지만 실은 독립운동의 국내 연락과 자금 공급을 목적으로 설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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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