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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갈라 자궁을 들어냈다” 일본군이 ‘위안부’에 저질렀던 가장 끔찍한 6가지 만행


문재인 정부는 지난 박근혜 정부 하에서 이뤄진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해당 합의로는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입장을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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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그러자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는 이에 상당히 불쾌한 내색을 밝히며 “합의를 조속히 이행할 것”을 촉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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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과거에 한일 위안부 합의를 들먹이며 평창올림픽에 불참하겠다고 입장을 밝혔으나 이내 이를 번복한 바 있다.

 

영화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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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한국의 누리꾼들은 더욱 분노하며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엿볼 수가 없다”, “정말 뻔뻔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일본이 이처럼 위안부 문제를 수십년 동안 외면해 오는 동안, 실제 피해자 할머니들은 그때의 상처를 안은 채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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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십대로서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었을 소녀들은 잔인한 일본군 손에 붙잡혀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만 했다.

 

영화 ‘귀향’

할머니들은 여전히 눈을 감으면 그 때의 기억이 선명히 떠올라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일본의 만행을 더욱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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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자료와 이토 다카시의 저서 ‘기억하겠습니다’에 근거해 일본군의 만행을 낱낱이 알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여섯 분의 증언을 모아 소개한다.

 

#1. 김학순 할머니 (1924~1997)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1921년 길림에서 출생했다. 김학순 할머니는 1941년 양아버지가 “중국 가면 돈 벌 수 있다”는 말을 해 이를 믿고 따라나섰다가 위안소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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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할머니는 “어떤 군인은 자신의 성기를 빨라고 했고, 어떤 군인은 물에 자신의 성기를 닦아 달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증언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생리를 하는 날에도 군인을 받아야 했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반항을 하면 죽도록 맞는 것이 일상이었기 때문에, 피가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도록 군의에게 솜을 받아 깊이 넣은 뒤 군인을 상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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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귀향’

그러나 위안소 환경이 열악했기 때문에 솜이 없을 때는 헝겊을 잘라서 말아 넣기도 했다. 돈을 벌 수 있다는 말도 모두 새빨간 거짓말에 불과했다. 김 할머니는 “위안부 생활이 끝날 때까지 단 한 푼의 돈도 받아본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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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할머니는 끔찍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호시탐탐 탈출 기회를 노렸고, 운 좋게 조선인 남자의 도움을 받아 위안소를 탈출했다.

이후 김 할머니는 1991년 8월 14일, 전 세계 최초로 자신의 위안부 피해 사실을 세상에 공개했다. 이 날, 일본군의 잔인한 만행은 세계에 낱낱이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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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차 일본군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 연대 회의’는 매년 8월 14일을 ‘세계 위안부의 날’로 지정했다. 용기를 내 피해 사실을 밝힌 김 할머니를 치하하고 앞으로의 일본군 성 노예 문제를 조속히 해결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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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대일 할머니 (1916~2005)

좌/영화’귀향’,우/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김대일 할머니는 1916년 황해북도 사리원시에서 태어났다. 18살에 일본군 동경에  12사단 ‘종군위안부’로 중국 장춘까지 끌려가는 모진 시련을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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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서 12번이라는 숫자와 일본식 이름 ‘이시가와 스지에’를 받은 김 할머니는 그 때부터 무려 12년 동안이나 일본군 위안부로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매일 새벽 일본 천황을 찬양하는 ‘궁성요배’를 강요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새벽 6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잠도 자지 못한 채 30에서 40명에 달하는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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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보리밥 한 덩이와 절인 무 한 조각을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그러던 하루는 50명의 군인을 상대하다 김 할머니가 쓰러졌고, 일본군은 할머니에게 마취약을 먹였다.

영화 ‘귀향’

할머니가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일본군은 담배에 휘발유를 묻혀 생식기와 입, 코 등에 꽂는 가학적인 행위를 일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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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한 장교는 김 할머니를 상대한 다음 “난 질렸다. 이제 네 차례다”라며 자신이 키우던 셰퍼드에게 김 할머니를 덮치게 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일본의 패전이 확실시되자 일본군은 위안부를 증거를 없애기에 급급했고, 위안부 150여 명을 두 줄로 세운 뒤 뒤에서 목을 베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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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할머니도 그 줄에 서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 할머니는 “정신을 차려 보니 시체 속에 묻혀 있었다”고 증언했다. 천운으로 살아남았지만 뒷목에는 칼로 베인 흉터가 수십 년이 지나도 남아 있었다.

김 할머니는 일본의 끔찍한 만행을 알려야 한다며 여러 번 증언대에 서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끝내 일본의 사과 한 마디 듣지 못하고 2005년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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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옥순 할머니 (1920~)

artic.or.jp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정옥순 할머니는 1920년 함경남도 풍산군에서 태어났다. 현재 북한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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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갔고, 그 곳에서 하루에 40명 넘게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다.

단순히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뜨거운 쇠꼬챙이로 몸을 지지는 것을 일상 다반사였다. “몇몇 친구들은 반항한다는 이유로 일본군 손에 붙잡힌 채 못판에 굴려지기도 했고 목을 베이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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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일본군들은 이렇게 죽인 시신을 삶아 남아있는 위안부들에게 먹으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1937년 정 할머니는 위안소에 있던 친구들과 도주를 시도했으나 이틀만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 날 일본군은 정 할머니의 입 안, 가슴, 배 아래에 문신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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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or.jp

수십 년이 흘렀지만 할머니의 몸에는 아직도 그 때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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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황금주 할머니 (1922~2013)

황금주 할머니는 1922년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약값을 벌어야 했기에 어린 나이로 부잣집 수양딸 생활을 했다.

(좌) 영화 ‘귀향’, (우) 황금자 할머니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스무 살이 되던 해, 황 할머니는 주인 집 딸 대신 중국 길림에서 위안부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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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2월, 군부대 막사에 들어서자 황 할머니는 담요 한 장과 누비 이불 한 장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위안부’의 실정을 잘 몰랐던 할머니는 그저 군인들의 밥과 빨래를 해 주며 생활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먼저 와 있던 다른 여성이 “너희들도 이제 죽었구나. 불쌍하다.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해야 맞아죽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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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이 되자 마자 할머니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장교들에게 끌려가 겁탈을 당했다. 나중에는 30~40명의 군인을 상대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장교들은 콘돔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위안부에 있던 소녀들은 종종 임신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임신한 여성들은 주사를 강제로 맞은 뒤 하혈했다. 그러면 의사는 자궁 속을 무자비하게 긁어냈고,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 자궁이 모두 헐어 임신이 더 이상 가능한 상태가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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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리경생 할머니(1917~2004)

1917년에 태어난 리경생 할머니는 12살에 경상남도 창원에 있는 군수공장으로 끌려갔다. 그 곳에서 16살 때, 일본군에 의해 임신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일본군은 리 할머니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꺼내는 만행을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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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할머니는 “당시 일본군이 ‘저 년을 써먹어야겠는데, 나이도 어리고 인물도 곱고 써먹어야겠으니 저년 자궁을 들어내 파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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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공개 증언이 있을 당시 리 할머니는 “12살 난 게 어머니 품에서 어린양 노릇하던 아이가 성노예 생활이 뭔지 알 턱이 있냐”며 “그놈이 들이대니까 아이 아래가 다 파괴됐다. 온통 구들바닥에 피가 쏟아져도 군인들은 쭉 들어왔고 성노예 생활을 했다”고 참담하고 끔찍했던 위안부 생활에 대해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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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김영숙 할머니(1927~2010)

김영숙 할머니는 1939년, 13살의 어리고 어린 나이에 중국 심양에 위치한 위안소에 끌려갔다.

그 곳에서 김 할머니는 5년 동안 위안부 생활을 했다. 그런데 그 동안 25명 중 20명이 죽어 나가는 것을 눈 앞에서 지켜봐야만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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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에게서 도망가다 잡히기라도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정도로’ 끔찍한 고문을 일삼았다고 한다. 매달아 놓고 때리거나, 쇠꼬챙이로 생식기를 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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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들은 이제 막 13살이 된 김 할머니에게 “일본 사람들 위대한 줄 모르면 네 간을 내먹겠다”고 칼을 들이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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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공포에 질려 도망가려 하자 칼로 살갗을 찢고, 구둣발로 사정없이 밟아 다리를 꺾어 놓는 만행을 저질렀다.

할머니의 몸에는 일본군이 남긴 잔혹한 고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