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Categories: 사람들스토리

취재 위해 ‘제발로’ 정신병원 들어간 미국 여성 기자의 이야기


그 어떤 시련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꿋꿋이 개척해가는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다.

ADVERTISEMENT

그들은 자신의 꿈을 짓밟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저항하며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올곧은 사람들이기도 하다.

최근 온라인 미디어 ‘격’은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했던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모험가인 넬리 블라이(Nellie Bly)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그녀는 아직도 미국에서 많은 여성들의 ‘롤 모델’로 선정되는 원조 ‘걸크러쉬’ 여성이었다.

point 85 |
Facebook ‘Women’s Right News’

넬리의 본명은 엘리자베스(Elizabeth Corchran)으로, 그녀는 1864년 미국 펜실베니아 주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point 242 |

ADVERTISEMENT

그녀의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가정 형편은 급격히 어려워졌다.point 30 | 결국 넬리는 엄마와 14명의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십대 때 고향을 떠나 도시로 오게 된다.point 69 | 넬리는 선생님이 되기 위한 직업 훈련을 받기 시작했지만, 직업 훈련 보조금이 떨어지자 이조차 그만둬야 했다.point 115 | 1

ADVERTISEMENT

그러던 어느 날, 1885년 그녀는 ‘피츠버그 디스패치’라는 신문을 보고 분노에 차올랐다. 신문에서 “여성은 요리와 육아에만 소질이 있다”고 언급한 문장을 보고 그녀는 화가 나서 단숨에 반박글을 써내려갔다. 넬리는 이 반박글을 신문사에 보내고, 놀랍게도 편집장은 이 글을 보고 그녀의 글쓰기에 커다란 감명을 받는다. 결과적으로 넬리는 해당 신문사에서 정식 기자로 채용된다.

ADVERTISEMENT

신문사에 취직한 이후부터 그녀는 ‘넬리 블라이’라는 지금의 필명을 써서 기자 활동을 시작했다. 주로 그녀는 당시 여성에게 차별적이었던 이혼법 개정이나, 노동자들의 처참한 근무 환경 등에 대해 과감히 파헤치는 기사를 썼다.

point 95 |
Syracuse

독자들은 이렇게 대담한 넬리의 기사를 보고 금세 그녀의 글에 빠져들었다.point 184 |

ADVERTISEMENT

사회적으로 문제시되는 일들이나 때로는 위험한 사건들까지 가감없이 보도하는 넬리는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탔다.point 48 | 그 결과 당시 가장 유명한 신문사 중 하나였던 ‘뉴욕 월드(The New York World)’의 취재기자로 활동하게 된다.point 102 |

ADVERTISEMENT

당시 뉴욕 월드에서 일한다는 것은 기자로서의 커리어에 정점을 찍는 일이었다.point 33 | 그곳에서 넬리는 ‘탐사 저널리즘(investigative journalism : 언론인이 범죄, 정치 부패, 기업 비리 등 특정 주제를 직접 탐사하여 취재, 발굴해내는 형태의 저널리즘)’의 기초를 닦게 된다.point 126 | 1

ADVERTISEMENT

그런 그녀가 선택한 것은 ‘정신병동’ 이었다. 당시 수년 동안 퀸즈와 맨해튼 사이의 이스트리버 강둑에 있는 ‘뉴욕 시 정신 병원’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난무했다. 바로 전 직원들이 이곳의 끔찍한 근무 환경과 비인간적인 환자 학대에 대해 폭로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병원에서 이뤄지는 의료 행위들에 대해 개인이 취재하거나 문제제기를 할 수 없었다. 그러자 그녀는 한 가지 결정을 내리게 된다.

ADVERTISEMENT
point 0 |
Facebook ‘Fern Pimravee Wongphunga’

바로 정신병에 걸린 것으로 위장해 해당 병원에 잠입 취재를 시도한 것이다.point 125 |

ADVERTISEMENT

상사는 늦어도 10일 뒤에 그녀를 빼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미 악명 높은 정신 병동에서 10일 동안 무슨 일이 있을지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point 62 | 넬리가 병원 경비원에게 병원을 가르키며 “무슨 일을 하는 곳이냐”며 물었을 때, 경비원은 “그 어느 누구도 ‘절대’ 도망칠 수 없다”고 대답했다.point 124 |

ADVERTISEMENT

이 말을 듣고도 넬리가 자원한 이유는, 그녀가 강심장이기도 하지만 취재를 향한 강한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point 46 | 1

넬리가 취재한 병원의 실상은 끔찍했다. 1,600여 명의 환자들이 좁은 병실에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상한 빵, 귀리 죽, 썩은 과일을 먹어야 했다. 건물 전체는 쥐로 들끓었고 환자들은 1주일에 딱 한 번, 그것도 모두가 같은 물을 사용해야만 목욕할 수 있었다.

ADVERTISEMENT
point 0 |
Facebook ‘Abandoned Historic Properties’

환자들에 대한 직원들의 폭력 또한 처참했다.point 118 |

ADVERTISEMENT

그들은 환자를 묶고, 발로 차고, 때리는 일이 다반사였다.point 25 | 심지어는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얼음물에 얼굴을 그대로 집어넣는 가학 행위 역시 일삼았다.point 63 | 의사들은 환자들이 불만을 표해도 그들이 정신병자라는 이유로 그 말을 모두 무시했다.point 99 | 병원 직원들은 고자질한 환자들을 대상으로 이들에게 더욱 끔찍한 학대를 가하기도 했다.point 136 | 1

ADVERTISEMENT
Grave Matters

넬리는 위장으로 병원에 들어오고 나서 그 즉시 평소처럼, 지극히 ‘정상인’처럼 행복했다. 하지만 병원의 그 어느 누구도 넬리를 정상인이라도 판단하지 않았다. 이를 보고 관찰한 결과 넬리는 정신 병동 안에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정신병을 앓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ADVERTISEMENT

10일이 흐르자, 넬리의 회사 측에서 지원한 변호사가 병원에게 정식으로 넬리를 내보내 달라는 법적 조치를 취한 후에야 그녀는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만약 신문사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녀 역시 병원에서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의사는 지극히 ‘정상적’인 그녀의 행동들을 근거가 그녀가 정신 질환을 앓고 있으며 병원에서 내보낼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ADVERTISEMENT

병원에서 무사히 나온 후 넬리는 ‘정신 병원에서의 10일(Ten Days in Mad-House)’라는 보고서를 작성한다. 이 일 이후 넬리는 전 세계적으로 화려한 명성을 얻게 된다. 넬리와 그 보고서는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고, 이 때문에 경찰 당국은 정신 병동을 조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관련 병원 직원들은 모두 수감됐고, 시에서는 할당 예산을 대폭 증대했다.

ADVERTISEMENT
넬리 블라이의 이야기를 토대로 만든 영화 ’10 days in a madhouse’

이처럼 넬리는 평생을 약자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진정한 언론인으로서 살았다. 그녀는 모험가이자, 작가였으며, 투쟁가였다. 넬리가 점점 유명해지자 넬리의 글을 읽고 전 세계의 여성들은 꿈과 용기를 갖게 됐다.

ADVERTISEMENT
newseum

그녀는 1922년 57세의 나이로 뉴욕에 위치한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넬리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미국은 여성 참정권론자들의 격렬한 운동 끝에 여성의 투표권을 보장했다.

ADVERTISEMENT

자신의 삶을 약자들을 위해 모험하는 데에 아낌없이 바쳤던 넬리 블라이. 그녀는 아직까지도 수많은 언론인들과 여성 운동가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Explore PA History